그녀가 죽었다 (2024)
1. 서론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이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은 없었다. 뜻하지 않게 시간이 비었고, 취미를 영화감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직장인이 된 나는 꽤나 즉흥적으로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연으로는 수염 기른 게 멋있는 몇 안 되는 배우인 변요한과 각종 드라마에서 로코퀸으로 날아다니는 신혜선이 있다. 두 배우의 팬이지만, 그간 출연한 영화들의 실적은 아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두 배우가 이 영화에서 제대로 연기변신을 했고, 어색하긴커녕 감탄이 나오는 명연기를 봤기에 이번 작품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바이다.
2. 내용
2-1. 초반부
구정태(변요한)는 유능한 공인중개사이다. 그에겐 은밀하고 다소 음침한 취미가 있었는데, 주변의 인물들을 관찰하고, 집에 침입해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통장이나 귀금속 같은 것도 아닌 다 쓴 핸드크림이나 쓰다 만 연애편지 등 잃어버려도 신경 안 쓸만큼 사소한 물건이며, 대가로 세면대를 뚫거나 문에 달린 경첩을 고치는 등의 수고도 한다. 그의 비밀창고엔 이미 몇 백개는 되어 보이는 수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의 새로운 관찰(?)대상은 인플루언서로 활동중인 한소라(신혜선). 유기묘들을 돌보고 후원금을 모으는 등 마냥 선하기만 한 그녀에 흥미를 느낀 그는 150일 가까이 그녀를 관찰한다. 다만 그녀의 집 도어락을 풀 수 없었는데, 우연히도 한소라가 집을 팔기 위해 구정태의 사무실을 방문, 카드키를 획득한다. 첫번째 침입 때 안정기가 나간 것을 기억하고 이를 고치러 침입한 그는 그녀가 자신의 소파에 피칠갑을 한 채 누워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밀려오는 구토를 참고 일단 현장을 빠져나간다. 그후 자연스러운 목격을 위해 주택 구매희망자를 데리고 재방문했을 때, 놀랍게도 그녀의 시신뿐 아니라 핏자국 하나까지 남김없이 사라져있었다. 범인도 정태의 침입과 목격사실을 알고 있을까, 정태는 두려움에 떤다.
2-2. 중반부 (부터는 스포)
정태가 소식을 듣고 찾아간 납골당에는 어머니의 칸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심지어 돌아오는 길에는 운전자 없는 트럭에 치일 뻔하고 나서, 정태는 모든 일의 원흉이 한소라를 살해한 범인이라 확신하게 된다. 한편 한소라의 동료 인플루언서 호루기는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고 오형사(이엘)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오형사가 정태의 사무실에 찾아오자, 정태는 자신이 의심받을까봐 횡설수설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정태는 본인의 관찰력을 활용해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엔 호루기를 의심했다가 이종학이라는 또다른 스토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쫓는 과정에서 집에서 습격을 당한다. 2인조 범인의 습격에서 빠져나와 오형사를 부르고 온 사이, 범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학이 목을 멘 채로 발견된다. 나머지 범인이 호루기라 생각한 정태가 그녀의 집을 찾아가 그녀를 제압하자 그녀에게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범인이 정태를 협박할 때 쓰던 편지봉투는 한소라가 사용하던 것과 같다는 사실을. 한소라는 어릴 때 가족과 의절한 뒤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거짓선행을 SNS에 올리면서 과거세탁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정태의 스토킹을 눈치챈 소라는 자신의 비밀을 들켰을 지도 모른다 생각해 정태를 역스토킹한다. 일부러 카드키를 쥐어줘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게 하고, 이종학을 이용해 정태의 신상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형사는 소라가 일했던 유흥업소에서 한소라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2-3. 후반부
소라의 정체를 알게 된 정태는 자신의 창고에 나타난 소라와 혈투를 벌인다. 물론 이것도 그녀의 계략의 일부. 뒤이어 출동한 경찰들의 손에 정태는 제압되고 소라는 구출된다. 그녀가 이토록 치밀하고 겁이 없는 이유, 정태는 그간 그녀를 관찰했을 때 미심쩍었던 점을 오형사와 공유한다. 몇 년 전 실종된 여대생이 소라와 같이 일한 유흥업소 직원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소라가 그녀를 죽였다는 심증을 품고 있었다. 경찰들이 증거를 찾을 동안 소라를 이종학의 사진관으로 유인한 정태는 그녀의 자백을 유도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도발에 넘어간 소라가 정태를 죽이려는 순간 증거를 찾아온 경찰들이 난입해 두 사람 모두를 체포한다. 소라는 2명의 살인과 1명의 살인미수, 정태는 다수의 주거침입죄로. 시간이 흘러 장기복역하게 된 소라와 달리 가석방된 정태는 어느정도 억울함이 풀리고 고객들의 민심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형사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데 오형사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돌려보낸다.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똑같은 가해자라는 말을 남긴 채.
3. 감상
3-1. 유추하기 쉬운 범인
사실 이런 장르물을 많이 본 사람들은 아마 시신 목격장면부터 범인을 예상했을 것이다. 거친 호흡을 내쉬지도 않고
고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시신.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으니 말이다. 범인 후보로 등장하는 호루기나 이종학 역시 인성이 나쁠지언정 수상한 점은 (딱히) 없었으니 소라의 자작극임을 유추하긴 어렵지 않았다. 물론 감독은 범인을 꽁꽁 감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스토리가 중반부쯤 됐을 때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동시에 그녀의 과거회상을 길게 다룬 것이 후반부에 정태와 소라의 대결구도가 이 작품의 백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2. 계속 일을 키우는 주인공
실질적으로 소라가 재등장하기 전까지 정태는 좀 답답한 모습을 보인다. 일단 안정기만 안 고쳤어도 모든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그건 논외로 하고, 살인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 오형사가 자신을 압박하자 냉큼 남의 집에 가서 차 키를 훔쳐 도주하는 모습, 납골당에서 복구된 어머니 칸을 다시 부수고 유골함을 들고 도망치는 모습 등 (이건 나중에 설명되지만) 을 보면서 들켜봤자 단순주거침입죄인데 왜 계속 전과를 늘릴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저명한 공인중개사 출신 머리로 본인의 일상인 관찰을 하면서 왜 진작 소라의 이중생활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자신이 들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못한 건지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 결말에서 암시하듯 이 캐릭터의 미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3-3. 과격해 보이는 동일시
마지막에 오형사가 정태를 보면서 하는 말은 관객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범죄자는 범죄자라며 '사이다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억울함이 제대로 전달된 사람들은 오형사의 태도가 너무 매몰차다고 느꼈을 것이다. 특히 나는 후자의 경우인데, 정태는 중반부까지는 비협조적이었어도 후에 연쇄살인마 한소라를 잡는 데 협력해 이종학 살인사건은 물론 미제상태였던 여대생 실종사건까지 추가로 해결하게 되었다. 동료 형사들에게 늘 사건을 빼앗기던 오형사로선 정태는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보인 그녀의 태도는 토사구팽, 딱 그 정도로 무례하게 느껴졌다. 물론 정태가 범죄자이고, 형을 다 살고 나왔어도 대중의 시선이 냉담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경찰이나 법조인은 이들을 대할 때 그 '낙인'을 지울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4. 명장면
4-1. 유골함에서 흉기를 꺼내고 오열하는 장면
범인을 예상한 상태로 영화를 보다가 멈칫한 부분은 정태 어머니의 납골당 칸이 부서져 있는 장면이었다. 한국영화 속 날고 기는 빌런들도 이 선을 넘은 적은 없다. 주인공에게 가족을 잃은 원한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설명하기 힘들다. 때문에 소라가 범인이라는 추리를 잠깐 내려놓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태가 유골함을 탈취해 차에서 유골함을 열 때까지 정태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유골함에서 피가 묻은 흉기가 나오는 걸 보고 다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단순히 감정적인 위협이 아닌 소라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씌울 수단이었던 것이다. 소라의 과거회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가족'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사이코패스였기에 이런 사고방식이 가능했었다. 본인이 헤친 유골함을 부둥켜안고 우는 정태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련하고 참담했다.
4-2. 이종학을 죽이기 위해 키스하는 장면
변요한도 맞지만 특히 신혜선은 이 영화에서 인생연기를 선보인다. 사실 소라가 범인인 것이 밝혀졌을 때만 해도 그냥 비도덕적인 인플루언서. 그 이상의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화자가 그녀로 전환되면서 그녀의 비인간적인 면모가 하나둘 등장한다. 과거에 돈을 받고 동생을 팔아넘기려 했다든지, 거짓 후원금을 모으기 위한 문서조작, 호루기와의 커넥션 등 여러 장면이 있지만 이종학을 구워삶는 장면이 뇌리에 남는다. 그가 몸소 증거조작과 흉기은닉, 살해위협을 실행한 것도 그녀의 가스라이팅이었다. 둘이서 정태를 죽이려다 실패했을 때 이종학이 손을 떼려 하자, 소라는 바로 이종학을 죽이려 한다. 예상 못했던 점이라면 그녀가 그를 달래며 키스를 한다는 건데, 그를 방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바로 그의 목에 줄을 매어 교살시킴으로 악역으로서의 그녀의 체급이 드러났다고 본다.
4-3. 소라가 정태의 눈을 찌르고 실성하는 장면
정태와의 싸움에서도 명장면이 많다. 소라가 일부러 스크린 야구장에서 눈에 멍을 들이고 오는 장면, 경찰이 올 때까지 적당한 자해를 하는 모습, 다시 만났을 때 정태의 녹취의도를 간파하고 비웃는 장면. 그중 압권은 당연히 최종적으로 정태와 소라 모두 체포되는 장면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모 살인범처럼 시치미를 떼다가 모든 일이 들통나자 미쳐 날뛴다. 별안간 그녀는 포박을 헤쳐나와 "너의 눈이 문제야"라며 정태의 두 눈을 찌른다. 이는 범죄자 소라의 입장에서도, 스토킹 피해자 소라의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중의적인 대사이다. 인과관계는 없지만 정태의 '눈'에 타격을 입히고 나서야(실명은 안 당했지만) 모든 사건이 막을 내리는 것은 공교롭다. 그래서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꼽았다.
5. 결론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범죄는 결국 드러나고, 형벌이 끝나도 사회적 낙인이 남는다는 것. 변요한도 본인의 역할이 미화되어 보이지 않도록 증량한 채로 영화 촬영에 임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피해자인 줄 알았지만 가해자인 두 명의 이야기, 손에 꼽을 정도로 악독한 악역의 서사, 두 배우의 인생연기가 매력적인 이 작품은 올해 상반기 봤던 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